일제강점기 조선의 은행업지배 (1910-1945)
서론
일제강점기 조선의 은행 시스템은 단순한 경제 인프라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와 경제적 수탈을 위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이 시기 은행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 근대 금융 시스템의 기원과 그 발전 경로에 미친 식민주의의 깊은 영향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근대적 은행 제도가 도입되기 전, 조선에서는 사금융(私金融)이 지배적인 금융 거래 형태였다. 이는 제도권 금융기관을 통하지 않고 사적 금융업자를 중심으로 자금이 공급되고 상환되는 방식이었다. 특히 농촌 경제를 크게 저해했던 고리채(高利貸)는 당시 금융 시장의 주요 문제였으며, 그 폐해는 해방 이후 1961년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이 제정될 정도로 심각했다.[1, 2]
외세의 영향이 커지면서 조선에서도 근대적 금융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1898년 한성(현 서울)에 국립중앙은행을 목표로 설립된 대한은행(大韓銀行)은 심상훈, 민영기 등 20명의 발기인들이 황실과 합자하여 주도했다.[3] 이는 일본인 금융기관의 조선 진출에 대항하기 위한 국립은행 설립 논의가 갑오개혁 이후 구체화된 결과였다.[3] 그러나 대한은행은 설립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영업 부진으로 폐점하고 말았다.[3] 이는 독립적인 한국 금융기관이 식민화가 진행되는 환경에서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준다.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은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으로, 창립 초기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하며 우리 고유의 회계법인인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Chibubeop)을 사용했다.[4] 그러나 1905년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으로 인한 금융 공황으로 1년간 휴업에 들어갔고, 1906년부터는 사실상 일본 통감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4] 이후 1912년에는 '조선상업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4] 이러한 초기 한국계 은행들의 실패와 일본의 영향력 증대는, 조선의 근대 금융 시스템이 자율적인 발전을 이루기 전에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금융 침투는 단순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을 넘어, 조선의 잠재적인 금융 자율성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고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근대 금융 시스템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설계되었으며, 이는 자원 수탈, 한국 시장의 일본 경제권 편입, 그리고 일본의 대륙 침략 자금 조달로 이어졌다.[2, 5, 6, 7]
I. 식민지 금융 지배의 토대 (1910년 이전 맥락)
전통 사금융
근대적 금융기관이 부재했던 시기, 조선의 대다수 민중,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사금융이 주요 금융 거래 방식이었다.[1, 8] 이러한 사금융은 종종 50%에 달하는 고리대(高利貸)를 특징으로 하여 [8], 많은 빈농들을 빚의 악순환에 빠뜨리고 경제적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했다.[1]
일본의 초기 금융 침투
일본은 공식적인 합병 이전부터 조선에 대한 금융 침투를 시작했다. 1878년 부산에 지점을 개설한 제일은행을 시작으로, 102은행, 18은행, 58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원산, 인천과 같은 주요 도시에 지점을 확장하며 조선 경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9] 이러한 초기 진출은 일본 화폐와 은행 업무에 대한 조선 경제의 익숙함을 높이며, 향후 일본의 금융 지배를 위한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근대적 금융 정책의 부재로 인해 이러한 일본의 금융 확장에 대해 사실상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9]
일본이 도입한 '근대적' 은행 시스템은 조선의 자율적인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조선 경제를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편입시키고 자원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정교한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근대적 기관이 설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조선인, 특히 빈농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고리대에 의존해야 했으며, 그 이율은 매우 높았다.[8] 이러한 극명한 대조는 '근대화'가 선택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즉, 일본 자본의 운영과 부의 추출을 위한 틀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조선 민중의 금융적 어려움을 방치하거나 심화시켰다. 고리대의 지속적인 존재는 '근대적' 금융의 혜택이 광범위하게 분배되지 않고, 식민 지배의 이익과 소수의 친일 세력에게만 집중되었음을 명확히 한다. 따라서 식민지 금융의 맥락에서 '근대화'라는 용어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식민 지배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구조적 변혁을 이루고, 기존의 불평등을 강화하며, 식민지 민중에게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종속을 초래한 과정을 나타낸다.
II. 제국주의 금융의 기둥: 일본계 은행
일제강점기 조선의 금융 시스템은 일본이 직접 통제하는 핵심 은행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이들 은행은 각각의 역할을 통해 조선의 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조작하고 통제하는 데 기여했다.
A. 조선은행(朝鮮銀行): 식민지 중앙은행
조선은행은 1911년 '구한국은행'의 후신으로 설립되었다. 1909년 11월 설립된 구한국은행은 수권자본금 1,000만 엔, 납입자본금 250만 엔 규모였으나, 주식 공모의 98%가 일본인 주주였고 임원 6인 중 조선인은 전무했다.[9] 설립 허가 역시 일본 대장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며, 창립 총회는 도쿄상업회의소에서 열렸다.[9] 1911년 8월, '한국'이라는 명칭을 지우고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설립일은 1909년 11월로 소급되었다.[9] 이는 일본의 완전한 합병 의지를 반영하는 조치였다.[9]
조선은행은 '조선은행법'(1911년)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 정부, 특히 1924년 이후에는 일본 대장성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았다.[2, 5] 총재와 부총재 등 핵심 임원은 일본 정부가 임명하여 도쿄로부터의 직접적인 통제와 지휘를 보장했다.[2, 5]
조선은행은 식민지 조선에서 은행권(조선은행권)을 독점 발행하고 국고금을 관리하는 특권을 가졌다.[2, 5] 은행권 발행은 '정화준비 + 보증준비 + 제한외발행'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는데, 정화준비금의 상당 부분이 일본은행권으로 구성되어 본국과의 직접적인 통화 연결고리를 형성했다.[2, 5] 보증준비 발행 한도는 1911년 3,000만 원에서 1939년 1억 6,000만 원으로 수차례 확대되었으며, 이러한 확대는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2, 5] 1941년에는 '최고발행한도제'로 변경되어 일본 대장상이 임의로 발행액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핵심적인 통화 조작 수단이 되었다.[2, 5]
조선은행의 가장 논란이 되는 역할 중 하나는 중앙은행이면서도 일반 상업은행 업무를 겸영했다는 점이다.[2, 5] 이는 일본은행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으로, 조선은행이 예금 수취 및 개인 대출을 통해 영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 5] 이로 인해 조선은행은 조선 내 일반 상업은행, 특히 한국계 은행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며 그들의 영업 기반을 잠식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 8, 10, 11] 1920년대 후반 부실 채권을 정리한 후에는 상업은행 업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다른 은행들의 영업을 더욱 위축시켰다.[2]
조선은행은 일본의 대륙 침략과 전쟁 자금 조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2대 총재 쇼다 가즈에(勝田主計)는 조선은행의 역할을 "일본, 조선, 만주에 걸친 경제 안정권(엔 블록)을 주도하는 것"으로 명확히 규정했다.[9] 조선은행은 만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조선은행권이 강제 통용력을 갖게 하고 관동주 및 남만주 철도 부속지에서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했다.[2, 5] 이러한 만주 진출은 조선의 무역 적자로 인한 정화(일본은행권) 유출을 보충하려는 은행의 필요성과 일본 군부의 '조선-만주 일체화' 정책이 맞물린 결과였다.[2, 5]
중일전쟁(1937년) 발발 이후, 조선은행권은 북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의 군용 통화로 직접 사용되었다.[2, 5] 일본은 '가공 예금 협정'이라는 정교한 금융 조작을 통해 중국연합준비은행이 조선은행에 대한 엔화 예금을 담보로 전쟁 비용을 위한 화폐를 발행하도록 했다.[2, 5] 실제 엔화 자금은 중국으로 송금되지 않고 조선은행 도쿄 지점에 축적되었으며, 이는 일본 내 국채 소화에 활용되어 본토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2, 5] 전쟁이 장기화되고 점령지 중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조선은 본토를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선'으로 활용되었다.[2, 5] 1944-45년에는 조선은행권의 발행 증가율이 일본은행권이나 대만은행권보다 현저히 높아, 조선이 일본 본토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흡수하는 희생양이 되었음을 보여준다.[2, 5]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12], 1943년에는 일본과 조선 간의 통화 연결이 사실상 단절되었다.[2, 5]
B.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수탈과 산업화 금융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10월, 기존의 6개 농공은행을 강제 통합하여 설립된 특수은행이다.[13] 그 설립 목적은 식민지 조선의 '개발' 및 '수탈'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하고 배분하는 것이었다.[13]
설립 당시 조선 전체 금융기관 대출 점유율의 20%를 차지했던 조선식산은행은 1931년에는 44%로 증가하며 일제강점기 최대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13]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산미증식계획'과 농업 개발을 지원하는 데 대출을 집중했다.[13] 관개 사업을 수행하는 수리조합과 토지 개량 사업, 그리고 지방의 금융조합에 대한 대출이 크게 늘었으며, 그 결과 농업 대출액은 1918년 654만 원에서 1936년 2억 1,966만 원으로 급증했다.[13] 이는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한 계획을 금융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1934년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고,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경영 방침을 크게 바꾸어 군수공업과 광공업 금융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13] 일제는 1937년 '임시자금조정법' 등을 통해 조선식산은행을 군수 부문 등 광공업 분야에서 총독부의 명령을 받는 은행으로 지정했다.[13] 이로 인해 광공업 대출액은 1936년 8,032만 원에서 1942년 4억 4,775만 원으로 급증했으며, 산업별 대출 구성에서 농업 부문은 48%에서 19%로 줄고 공업 부문은 12.5%에서 35.8%로 크게 늘었다.[13] 조선식산은행은 또한 사채 및 대출, 직원 파견을 통해 특정 기업의 설립 및 인수에 직접 참여하여 '식은계(殖銀系)' 기업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13, 14] 이는 식민지 조선의 산업 구조를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형태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C.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토지, 이주, 금융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국책회사였다.[15] 그 주된 임무는 식민지 경영, 특히 농업 경영, 대규모 토지 매입, 그리고 일본인의 조선 이주 촉진이었다.[15]
동척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가장 큰 지주가 되었다. 1942년 말에는 20만 722정보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했다.[16]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수확량의 50%에 달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고, 춘궁기에는 20%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데 앞장섰다.[16] 이러한 수탈은 한국인들의 대규모 해외 이주를 야기했으며, 약 29만 9천 명의 빈농이 토지를 잃고 북간도로 이주하기도 했다.[16] 또한 동척은 수탈한 토지를 기반으로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며, 이들이 조선 민중을 착취하는 일제의 대변자 역할을 하도록 지원했다.[16]
동척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척식자금'을 운영하고 농공업 개발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 사업이었다.[15, 16] 1917년 법 개정을 통해 동척은 '척식 금융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대출 범위를 확대했으며, 만주, 중국, 필리핀, 남양군도 등지로 영업 지역을 넓혔다.[15] 특히 만주에서는 부동산 금융에 주력하며 일본 기업의 진출을 지원했다.[15] 동척은 일반 상법상 자기자본의 10배(이후 15배)까지 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식민지 수탈 활동을 벌였다.[15]
기관명 | 설립 연도 | 주요 목적 | 핵심 활동 |
---|---|---|---|
조선은행 | 1909년 (구한국은행), 1911년 (조선은행) | 식민지 중앙은행 | 화폐 발행, 국고 관리, 상업은행 겸영, 대륙 침략 및 전쟁 자금 조달 |
조선식산은행 | 1918년 | 산업 및 농업 금융 | 산미증식계획 자금 공급, 군수 및 중공업 금융, '식은계' 기업 집단 형성 |
동양척식주식회사 | 1908년 | 식민지 경영 및 토지 수탈 | 대규모 토지 매입 및 관리, 일본인 이민 정착, 농공업 개발 자금 공급 |
위의 세 주요 일본계 금융기관, 즉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개별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도로 통합되고 상호 보완적인 시스템을 형성했다. 조선은행은 전반적인 통화 정책과 자금 흐름을 통제하며, 금융 시스템이 일본의 전략적 필요, 특히 대륙 확장과 전쟁 자금 조달에 봉사하도록 했다.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과 상업은행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직접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통화 통제권을 유지했다. 조선식산은행은 일본의 자원 확보 및 산업적 필요에 중요한 농업 및 중공업 부문으로 자금을 집중시켰고, '식은계' 기업 집단을 형성하여 핵심 산업에 대한 일본의 통제를 강화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가장 근본적인 자원인 토지를 직접 관리하고, 이민 및 소작농 정책을 통해 노동력을 통제했다. 동척의 금융 활동은 이러한 토지 취득과 한국 농민 수탈에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며 광범위한 식민지 경제 구조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이들 기관은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에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은행의 화폐 발행은 식산은행과 동척의 운영을 용이하게 했고, 식산은행의 농업 대출은 산미증식계획을 지원하여 동척의 토지 관리에 이바지했다. 조선은행이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사용한 정교한 '가공 예금' 방식 [2, 5]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금융 기계의 복잡하고 조직적인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층적인 금융 구조는 조선 경제의 모든 측면, 즉 통화, 토지, 농업 및 산업 생산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위해 체계적으로 통제되고 수탈되었음을 보장했으며, 진정한 자생적 발전이나 번영의 여지는 거의 남기지 않았다.
III. 일반 은행의 지형과 한국인의 저항
A. 구조와 경쟁
일제강점기 조선의 금융 시스템은 일본 본토와는 다른 특성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특수은행과 일반 상업은행이 분업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반은행의 발달이 미진하다는 이유로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 같은 특수은행들이 상업은행 업무를 겸영하는 것이 허용되었다.[8, 10, 11] 이는 특수은행들이 더 작은 규모의 일반은행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며 이들의 영업 기반을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다.[8, 10, 11]
또한, 지방의 금융조합(金融組合) 역시 일반은행에 도전이 되었다. 금융조합은 저리의 자금을 공급하고 조합원이 아닌 사람의 예금까지 취급하며 일반은행의 전통적인 영업 영역을 침범했다.[10, 11]
B. 한국계 은행의 도전
한국계 은행들은 식민지 금융 시스템 내에서 심각한 구조적 불이익에 직면했다. 전체 금융기관 예금에서 일반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0년 54%에서 1930년 37%로 급감했으며, 대출 비중 역시 같은 기간 47%에서 16%로 하락했다.[10, 11] 이러한 감소는 특수은행과 금융조합의 특권적인 지위와 공격적인 경쟁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한국계 일반은행들은 만성적인 불황, 부동산 담보 위주의 고정 대출(불황 시 유동성 경색을 야기), 그리고 예금 유치를 위한 치열한 경쟁 등으로 경영 위기에 자주 직면했다.[10, 11] 이들은 자본금과 순이익 감소를 겪으며, 심지어는 협정이자율을 무시한 '예금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10, 11] 이에 따라 부동산 고정 대부를 정리하고 은행원을 감축하는 등 고육지책을 마련해야 했다.[10, 11]
조선총독부는 은행 합병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특히 1929년 '은행령' 개정 이후 자금 지원을 통해 합병을 유도했다.[10, 11] 이로 인해 1920년 21개에 달했던 일반은행 수는 1930년 13개로 감소했다.[10, 11] 이러한 합병은 표면적으로는 불황 타개를 위한 은행 자본의 대규모화를 목표로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인들이 한국계 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이었다.[10, 11]
식민지 은행 시스템은 민족적 분리가 뚜렷했다. 한국인 은행은 주로 한국인 고객을, 일본인 은행은 일본인 고객을 대상으로 했다.[8, 10] 결정적으로, 대다수의 조선인, 특히 빈농들은 근대 금융기관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었고, 여전히 50%에 달하는 고리대 사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8] 반면 소수의 자산가들은 근대 금융기관에서 저리로 자금을 대출받아 고금리로 빌려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8]
이러한 압도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일부 한국계 은행들은 명맥을 유지하며 미래의 자생적 금융 기반을 다졌다. 정재학(鄭在學)은 한국 금융업계의 중요한 인물로, 1913년 대구은행을 설립하여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최대 주주이자 은행장으로 재직했다.[17] 대구은행은 이후 경남은행과 합병하여 경상합동은행이 되었고, 정재학은 여기서도 경영권을 유지했다.[17] 그의 가문의 자본과 은행 경영 노하우는 조흥은행(朝興銀行)의 지분으로 이어졌다.[17] 조흥은행은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1943년 출범했으며, 해방 후 54%의 한국인 지분 비율을 유지하며 민족 자본의 적통을 이었다.[17] 정재학의 3남과 장손이 조흥은행장을 역임하는 등, 식민지 압력 속에서도 민족계 금융 자본의 놀라운 회복력과 보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7]
C. 금융 공황과 그 여파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은 일본 관동대지진(1923년) 이후 발생한 부실 어음 처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18] 일본 정부가 재벌 구제를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고 부실 기업에 대한 지원을 은밀히 진행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이 심화되었다.[18] 정치권의 대립으로 문제 해결이 지연되면서 1927년 3월 도쿄와타나베은행의 자금 부족 문제가 공개되자 금융 공황이 촉발되었다.[18] 이튿날 44개 은행이 휴업에 들어가고 파산하는 은행들이 속출했으며, 스즈키상점 같은 대기업의 파산은 주거래은행인 대만은행을 위협했고, 이는 다시 조선은행의 위기로 이어졌다.[18] 이는 조선이 일본 본토의 금융 불안정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취약했는지를 보여주었다.[18]
1927년의 금융 공황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와 겹쳐 '쇼와 공황'으로 불리는 장기적인 경제 침체를 야기했다.[19] 이 시기 일본은 주가 폭락(50% 이상) [19], 대규모 실업자 발생(300만 명) [19], 막대한 금 유출(6개월간 2억 3천만 엔) [19] 등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 경제 또한 깊은 고통을 받았다. 현물 대신 돈으로 소작료를 받던 농민들은 쌀값 하락으로 생활 수준이 급락했고, 도시 빈민이 급증했다.[19]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식민지 정책의 방향을 군수 산업 금융과 자원 수탈 강화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국내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을 더욱 착취하는 결과를 낳았다.[19]
지표 | 1910년 | 1920년 | 1930년 | 1924년 (특정) |
---|---|---|---|---|
일반은행 예금 흡수율 (전체 금융기관 대비) | 54% | 41% | 37% | - |
금융조합 예금 흡수율 (전체 금융기관 대비) | - | 8% | 27% | - |
일반은행 대출 점유율 (전체 금융기관 대비) | 47% | 24% | 16% | - |
식산은행 대출 점유율 (전체 금융기관 대비) | - | 31% | 45% | - |
금융조합 대출 점유율 (전체 금융기관 대비) | - | 11% | 19% | - |
일반은행 대출액 중 일본인 대출 비중 | - | - | - | 61% |
일반은행 대출액 중 조선인 대출 비중 | - | - | - | 38% |
조선인 은행 대출액 중 조선인 대출 비중 | - | - | - | 79% |
일본인 은행 대출액 중 일본인 대출 비중 | - | - | - | 84% |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계 은행의 어려움은 단순한 시장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적인 억압의 결과였다. 식민 정부의 정책, 즉 특수은행의 상업 활동 허용과 강제 합병은 독립적인 한국 자본의 성장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대다수의 조선인이 근대 금융 서비스에서 배제되어 고금리 사금융에 의존해야 했던 반면 [8], 일본 자본은 번성했다. 이는 의도적인 금융적 박탈 전략을 보여준다. 정재학과 같은 인물들의 끈기 있는 노력과 조흥은행의 계보 [17]는 일종의 조용한 저항과 일부 민족 자본의 보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조차도 식민 지배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근본적으로 설계된 시스템 내에서 엄청난 압력 속에서 달성되었다. 일본의 이익이 지배권을 장악한 강제 합병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시장 반응이 아니라, 일본의 금융 지배를 전략적으로 공고히 하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금융 시스템은 견고하고 독립적인 한국 금융 부문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저해했다. 이는 금융의 '근대화'가 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향해 자원을 조달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장했으며,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금융적 취약성과 수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IV. 경제적 영향과 전쟁 자원 동원
A. 인플레이션 압력과 통화 조작
1935년부터, 특히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은행은 일본의 급증하는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폐를 발행해야 했다.[12] 이는 일본 정부가 초기 금융 시장에서 충분한 세금을 징수하거나 국채를 발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12]
이러한 무분별한 통화 발행은 조선에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1945년 9월 12.4에서 1949년 257.2로 약 21배 급등하여 [12], 조선 민중에게 막대한 경제적 고통을 안겼다. 식료품 가격은 폭등했으나 임금은 정체되었다.[12]
조선은 일본의 대륙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흡수하여 일본 본토를 보호하는 '방어선'으로 전략적으로 활용되었다.[2, 5] 이 정책으로 인해 1943년에는 일본과 조선 간의 통화 연결이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행되었다.[2, 5]
연도 | 조선은행권 발행 잔액 (정성적) | 소비자물가지수 (CPI) | CPI 상승 배율 (1949년 vs 1945년) |
---|---|---|---|
1935 |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한 대규모 증발 시작 | - | - |
1945년 9월 | - | 12.4 | - |
1949년 | - | 257.2 | 약 21배 |
위 표는 일본의 전시 금융 정책이 조선에 미친 파괴적인 경제적 영향을 정량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은행의 통화 증발(정책적 조치)과 조선 민중이 겪은 심각한 하이퍼인플레이션(직접적인 결과)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여, '전쟁 자금 조달'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소비자물가지수의 21배 급등은 조선인들이 겪은 막대한 경제적 고통과 구매력 상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며, 식민지 수탈의 인적 비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이는 조선이 일본 본토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인플레이션 방어선'으로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자료이며, 식민지 금융 시스템의 착취적 본질을 강조한다.
B. 체계적인 자원 수탈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조선에서 최소 464억 엔에 달하는 자금과 물자를 수탈했다.[20] 이 수치는 보수적인 추정치이며, 실제 수탈액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평가된다.[20]
금융 부문은 이러한 수탈의 주요 통로였다. 금융 부문에서만 255억 엔이 수탈되었는데, 이는 유가증권, 대출금, 대일환거래 잔고, 계통화, 국고금 유출, 보험금, 체신 관계 유출액 등을 포함한다.[20] 조선에서 직접 유출된 전비(戰費)는 17억 8천만 엔에 달했다.[20]
금융 및 물질 자원 외에도, 136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노동자(일본 본토, 사할린, 남양 군도 등) 및 군인, 군위안부 등으로 강제 동원되었다.[20]
1965년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경제 협력'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3억 달러는 1945년 가치로 추정되는 일본의 수탈액 31억 달러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20] 이는 20년간의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수탈액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20]
C. 조선 경제의 변형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라 비정상적으로 재편되고 운영되었다.[6] 일본은 조선을 식량 공급, 자원 수탈, 그리고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로 활용하는 데 주력했다.[6]
이로 인해 전통적인 농업 사회는 해체되었고, 소작 쟁의와 같은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6] 1930년대에는 제조업 부문이 성장했지만, 이는 주로 일본 기업의 투자 증가에 의한 것이었고,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중화학 공업(금속, 화학, 전기기구 등) 확장에 집중되었다.[6] 한국계 중소기업들은 원자재 부족과 총독부의 생산 규제로 인해 대부분 폐쇄 위기에 처했으며, 1940년대 제조업 생산의 94%를 일본인이 차지했다는 사실은 식민지 제조업 발전의 실체를 명확히 보여준다.[6] 이는 한국 산업이 일본의 전쟁 경제에 완전히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증거들은 식민지 금융 시스템과 광범위한 조선 경제가 일본의 전쟁 기계에 필수적인 부속물로 체계적으로 변모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조선식산은행의 초점이 농업 '개발'에서 중공업 및 군수 산업 금융으로 전환된 점 [13]과 조선은행이 대륙 확장 및 군용 통화 사용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점 [2, 5]은 금융 자원이 군사적 목표로 완전히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을 '인플레이션 방어선'으로 의도적으로 사용한 정책 [2, 5]은 조선이 일본 본토 경제를 전시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일회용 경제적 희생 지역으로 활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 결과 발생한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 [12]은 일본의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 민중을 직접적으로 빈곤하게 만들었다. 막대한 규모의 자금 수탈과 강제 인력 동원 [20]은 이러한 금융 시스템이 식민지로부터 최대한의 자원과 노동력을 추출하는 데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거의 전적으로 일본의 통제하에 있던 중화학 산업으로의 산업 재편 [6]은 이러한 그림을 더욱 공고히 한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은행 시스템은 단순한 금융 인프라를 넘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궁극적으로는 전쟁 기계를 가동하기 위해 조선으로부터 부와 노동력을 수탈하도록 설계된 정교하고 무자비한 총체적 경제 동원 메커니즘이었으며, 이는 조선 민중에게 엄청나고 파괴적인 대가를 치르게 했다.
V. 유산과 해방 후 금융으로의 전환
해방 직후의 변화
1945년 8월 해방 직후, 조선은행은 식민지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이어받아 은행권 발행 독점, 국고금 관리,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은행의 은행 역할을 수행했다.[11] 조선무진회사(상호저축은행의 전신), 조선신탁회사(1932년 서울에 설립된 신탁회사), 조선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 등 다른 식민지 금융기관들도 일반 업무를 취급하며 은행 수가 급증했다.[21]
그러나 조선은행은 독립된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대장성의 허가를 받아 은행권 발행 한도를 조정했지만, 해방 후에는 이를 대체할 기구나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11] 또한, 조선은행은 발권 은행이면서도 일반 은행 업무를 겸하여 다른 은행들과 경쟁하는 문제가 지속되었고, 다른 금융기관을 통제할 법적 근거가 전혀 없었다.[11] 급증한 은행 점포의 난립은 부실을 야기하여 1947년 은행 점포 정리안이 발표되기도 했다.[21]
식민지 은행의 대한민국 근간 기관으로의 전환
조선은행은 식민지적 태생과 문제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수립 후 한국은행(韓國銀行) 설립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11] 이 전환 과정은 식민지적 특성을 벗고 진정한 국가 중앙은행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중요한 개혁을 수반했다.
식민지 수탈의 핵심 기관이었던 조선식산은행은 해방 후 일본 자본의 소멸과 개발은행 업무 수행 불능으로 해체되었다.[13, 22] 그리고 1954년 '한국산업은행법' 제정으로 한국산업은행(韓國産業銀行)이 설립되어 신생 국가의 국책 개발은행 역할을 이어받았다.[13, 21] 조선저축은행은 제일은행의 전신이 되었고 [21], 조선무진회사는 오늘날의 상호저축은행으로 발전했다.[21] 조흥은행과 같이 상당한 한국인 자본 기반과 계보를 유지했던 한국계 기관들은 자생적인 금융 기반을 재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1954년 은행법 제정은 금융기관을 정부의 직접적인 감독에서 벗어나 금융 민주화를 이루려는 중요한 발걸음이었다.[6, 23]
식민지 은행 시스템이 현대 한국 금융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
식민지 은행 시스템의 제도적 구조, 운영 관행, 심지어 일부 인적 유산은 비록 개혁되고 재편되었지만,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기 금융 시스템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쳤다. 독립적인 금융 정책을 수립하고,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며, 자생적인 자본을 육성하는 과제는 식민지 과거의 유산에 의해 계속해서 형성되었다.
해방 후 시기는 실용적인 딜레마에 직면했다. 기존의 식민지 기관들을 해체하면 공백이 생기고, 재편하면 문제 있는 구조와 사고방식을 계승할 위험이 있었다.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 같은 기관들을 대체하기보다는 대부분 계승하고 변모시키는 선택은 기능적인 금융 인프라를 즉시 활용할 수 있게 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한 본질적인 설계 결함과 유산을 안고 가는 위험을 내포했다.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의 이중적인 상업적 역할과 통제 메커니즘의 부재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던 것 [11]은 식민지 구조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금융 민주화'를 위한 노력 [23]과 고리대 사금융과의 지속적인 싸움 [1]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구조적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수십 년간의 의도적인 정책과 제도 개혁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유산은 계승된 인프라와 깊이 뿌리박힌 시스템적 문제의 복합적인 혼합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해방 후 금융 발전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은행 시스템으로부터 물려받은 깊이 박힌 착취적 구조를 끊임없이 적응시키고, 개혁하며, 종종 투쟁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유산은 한국 경제 발전의 궤적과 진정한 금융 독립을 향한 노력을 심오하게 형성했다.
결론
일제강점기 조선의 은행 시스템은 조선의 자율적인 경제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통제와 경제적 수탈을 위한 정교하게 설계된 도구였다. 이 시스템은 자원 추출, 시장 통합, 그리고 대륙 확장을 위한 일본의 전략적 필요에 봉사하도록 의도되었다.
이 시기의 금융 시스템은 강력한 일본계 특수은행들, 즉 중앙은행이자 상업은행 경쟁자였던 조선은행, 수탈과 이후 전쟁 산업에 자금을 공급한 조선식산은행, 그리고 토지 취득과 강제 이주를 관리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중심으로 지배되었다. 이들 각 기관은 식민지 체제 내에서 독특하면서도 상호 연결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계 은행들은 특권적인 일본계 기관들의 체계적인 억압, 차별적인 정책,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여 주변화되었고,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근대 금융 서비스에서 배제되어 착취적인 사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기간 동안 식민지 은행 시스템은 일본 전쟁 기계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되어, 무분별한 통화 조작, 조선의 하이퍼인플레이션, 그리고 금융 및 인적 자원의 체계적인 수탈을 초래했다.
식민지 은행 시스템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지대하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이는 미발달된 자생적 자본, 외부 이익에 맞춰 왜곡된 경제 구조, 그리고 진정한 자율성이 결여된 초기 금융 시스템으로 특징지어진다. 해방 이후 한국은 이러한 식민지 기관들을 국가적 이익에 봉사하도록 계승, 개혁, 재편하는 어렵고 수십 년에 걸친 과정을 겪었으며, 이는 현대 한국 금융의 궤적과 경제적 자결권을 향한 여정을 심오하게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