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by 오, 자네 왔는가 2025. 5. 5.
반응형

프랑소와 비용은 가난뱅이 집 자식으로 태어나

서늘한 높새바람이 그의 요람을 흔들어 주었네

눈보라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는

머리 위로 텅빈 하늘만이 아름다웠네...

-베르톨트 브레히트 <프랑소와 비용에 대하여>

 

 

 

유년의 뒤 안

 

  막상 ‘적극적으로’ 아기를 낳기로 결심하자 또 다른 망설임이 고개를 디밀었다.

나에게만 있을 듯한 거대한 암초!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빨리 안 일어나 이년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다. 호통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나는 잠에서 깬다.

어젯밤 역시 빨리 자라고 다그치는 엄마의 고함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겁나는 일곱 살! 아니 여섯 살!

 

  내가 조금만 굼뜬 행동을 보이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빗자루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신세타령을 쏟아놓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방청소를 할라치면 일상에 깔리는 배경음악처럼 엄마의 잔소리가 흐른다.

게을러 터져서 꼭 깨우고 소리쳐야 일어난다는 둥, 애비 닮아 저 모양이라는 둥...그런데 그 날 따라 엄마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노여움이 짙게 묻어있다. 몸을 일으키는데 빗자루가 머리 깨를 후려친다. 악!!!

 

  너무 많이 잠을 자서 퉁퉁 눈이 부은 것을 보라며 힐난 하는 화난 엄마 얼굴이 뒤이어 보인다.

“미경엄마, 미경이 얼굴 좀 봐요. 얼굴 전체가 심하게 부었잖아

미경이 어디 아픈 것 같은데? 미경아 괜찮니?”

옆집 아줌마가 안쓰럽게 나를 바라본다. 마음에 물기가 말라버린 걸까? 나를 위해 한마디 해준 아줌마 말이 마음으로 스며들어 눈물 콧물이라도 흘릴 법 한데 나는 화다닥 뛰어 나가 세수를 한다.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당시 나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옛날에 나한테 왜 그렇게 심하게 했어?”

“니가 못돼서 그랬지.”

 

  친정엄마를 떠올리면 나는 아기를 낳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성장기의 어느 시기부턴가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닮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쓰는 말투나 눈살 찌푸려지는 어떤 행동이나 습관이 내게는 거의 없다.

 

  대학시절 문득 여동생이 엄마가 쓰는 용어를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 나는 저런 말을 안 쓰네, 생각했다.

내 유년의 기억들은 고통스러웠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부드럽고 다정한 엄마의 미소나 칭찬 같은 것은 그야말로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한편 아버지는 엄마의 행동에 일체 태클을 걸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전실 소생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때문에 많이 다투신 것 같다. 어린시절이지만 오빠들 때문에 싸우던 부모님의 모습이 선명하다. ‘미경이는 내 새끼니까 내가 죽이든 살리든 놔둬라’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친정엄마는 아버지와 싸우고 나서도, 오빠들에게 화가 나도 나를 때렸다. 동생들이 태어나자 동생과 싸운다고 경기를 하도록 매질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19년의 나이 차가 난다. 나이 많은 남편과 나이 많은 전실 자식들에 대한 울화를 어머니 스스로 잘 다스리지 못한 것같다. 중학생 이후 나는 반항아가 되었다.

 

   스무 살까지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유년의 기억이란 긴장과 두려움이 전부다.

어디 가서든 긴장하며 주눅이 들었고 엄마를 화나게 하는 문제투성이 인간이란 자책으로 괴로웠다. 그 시절을 버텨 올 수 있었던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공부하는 것’ 이었다.

엄마의 기준에서는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이었지만 나는 학교에서는 인정받았고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도 많았다. 나를 이쁘게 봐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정말 이상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다니! 나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나는 알고 보면 천하에 몹쓸 아이인데 학교에서는 연극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 나는 세상에서 제일 못됐고 나쁜 아이라는 생각이 이미 골수까지 각인된 것이다.

 

   스무살이 되고 서른살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인지 내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결함이 있는 인간인지 알 수가 없다.

어린시절의 온갖 비난과 폭력의 기억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시시때때로 일깨워 주었다.

또 나의 모든 욕구나 감정이나 의견을 극도로 통제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삶은 개인에게 대단한 고통을 초래한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친정 엄마가 한 방식대로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 나의 미숙함을 감추려고, 혹은 내 성미를 못이겨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아이의 단점을 후벼파고 까발릴 지도 모른다. 아이가 얼마나 나쁜지 이웃에게 친척들에게 알릴 것이다.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니 난 아이를 갖지 말자!

 

   새끼를 낳아 기르는 어미의 역할이란 얼마나 치명적인가?

정신적인 내상 때문에 세상살이가 천형처럼 고단한 내가 아이를 낳아 대체 어쩌자는 건가? 아이는 행복할까? 아이는 엄마인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게다가 마흔이 넘어 아이를 갖겠다니!

내가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아이는 행복할까?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내가 아이를 진심으로 원하는지?

나와 남편이 아이를 원한다고 쳐도 내 아이도 태어나길 원할까?

 

  세상에 태어난 내 아이는 행복할까?

힘든 인생살이 뭐가 좋다고 아이에게 물려줄 것인가? 아이는 낳아준 걸 고마워 할까? 나의 체면을 위해, 혹은 공동체의 삶의 룰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내 아이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그 즈음 나는 참 기이한 경험을 했다.

잠을 자는 내내 너무도 놀라운 꿈을 꿨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소위 길몽을 연속적으로

꾸는 날들이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지금껏 점집에서 점을 본 적도 없다.

 

  점이라는 걸 믿지 않았고 뭔지 안 좋은 말을 들을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꿈들을 꾸었고 그 기억이 하도 좋아서 처음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꿈 해몽을 보았다. 대부분 ‘고귀하고 소중한 자녀를 잉태할’ 태몽이었다. 그 태몽이라는 것이 너무도 환하고 밝고 아름다워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한동안 멍하다.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예전에도 꿈을 종종 꾸었지만 기억도 나지 않고 아무 느낌도 없었다. 간혹 무서운 꿈을 꾼적은 있지만 꿈이란 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그런 종류였다. 소위 ‘개꿈’말이다. 나이 마흔이 넘고 보니 참 요상한 일도 다 있구나싶었다.

요즘은 거의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간혹 악몽을 꾸거나 의미없는 단편적인 꿈을 꿀 뿐이다. 아무튼 당시에는 꿈을 꾸고 나서 꿈 해몽을 뒤져보는 낙으로 하루를 보낼 정도였다. 어떤 종류의 신도 믿지 않았지만 나의 꿈이 놀랍고 뭔가 의미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꼈다. 나이가 드니까 난 ‘과학적인 것만 믿는다’는 젊은 날의 오기도 천천히 사라졌다.

 

  꿈의 내용을 노트에 적어두기 시작 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공허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해서는 영영 내 아이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이 엄습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있었다. 에라, 아이를 갖자. 이렇게 꿈이 좋은데 뭐. 세상에 이런 태몽이 또 있을까? 우리가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면 되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