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신라 서기 617년경, 진평왕 39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栗谷)에서 태어났다.
성씨: 설(薛)
출신: 신라 경주
자(字): 법명 원효. 출생 이름은 서당(誓幢) ·신당(新幢). 압량(押梁:慶山郡) , 설총의 아버지이다.
호: 소성거사(小性居士)
주요 활동: 신라 시대의 고승으로 화쟁(和諍) 사상을 전개하고, 불교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함. 해동종의 시조이며, 31세때 황룡사 승려가 되었으며, 자신의 집을 바쳐 초개사를 세우고, 영취산의 낭지, 흥륜사의 연기, 고구려 반룡산의 보덕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았는데, 그의 총명함과 불심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조부는 잉피공(仍皮公,赤大公이라고도 함)이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 내마(柰麻)의 지위에 있던 담날(談捺)이다.
설총(薛聰)을 낳은 뒤에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보살(海東菩薩),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도 불린다.
불교 사상 : 화쟁사상(和諍思想), 일심사상(一心思想)
💡 '설' 씨는 어떤 가문인가?
설씨는 신라의진골 귀족출신입니다.
원효의 가문은 학문과 도덕적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철학과 행동은 신라 불교뿐 아니라 한국 불교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 부모
부: 설진랑(薛珍郞) → 신라의 귀족(진골) 출신으로 전해지며, 역사 기록에는 많지 않지만 설씨 가문은 명문가였습니다.
모: 기록이 뚜렷하게 전해지지 않음 → 일반적으로 원효의 아버지만 간단히 언급되며, 어머니에 대한 문헌은 거의 없습니다.
👶 자녀
아들:설총(薛聰)
신라6두품출신
유교 경전에 능통했으며, **이두(吏讀)**를 체계화한 인물로 유명
문무왕과 신문왕 시기에 활약
신라의 대표적인유학자로, 고려시대에 문묘에 배향됨
저서: 『화왕계(花王戒)』 – 신문왕에게 올린 유교적 충언
🧩 참고 일화
원효는 의상대사와 당나라에 유학을 가던 중, 어느 동굴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뒤 귀국하고, 출가 승려로서가 아니라 **거사(居士)**로 활동하게 됩니다.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는 전설도 있으나, 이는 후대의 민간 전승으로공식 역사 기록에는 요석공주와의 혼인 사실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에 위치한 백곡리 산91번지 일원 고분군은 삼국 시대 백제의 고분군으로, 최근 학계에서는 백곡리 고분군이 원효대사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오도처(悟道處)'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화성시문화대전
지명적 근거: 고분군 인근에 '입피골'과 '향기실'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며, 이는 전통적으로 원효대사의 전설과 관련된 지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 맥락: 화성시 마도면은 삼국 시대 국제 무역항인 당항성과 인접한 지역으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이 지역을 지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학술적 주장: 동국대학교 고영섭 교수와 세종대학교 황보경 교수는 백곡리 고분군이 원효대사의 오도처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백곡리 고분군 개요
위치: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1번지일원
시대: 삼국 시대 백제
형태: 돌덧널무덤(석곽묘)으로, 일부는 앞트기식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굴 조사: 1971년 최초 조사 이후, 199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2기의 고분을 확인하고 6기를 발굴 조사하였습니다.
출토 유물: 토기류, 철기류(손칼, 창, 화살촉 등), 마구류, 갑옷 일부 등이 출토되어 백제와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 방문 정보
주소: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1번지 일원
접근 방법: 화성시청에서 차량으로 약 30분 거리이며, 백곡2리 마을 북쪽의 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항: 고분군은 현재 현지 보존 중이므로, 방문 시 문화재 보호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설총(薛聰, 660?~730?) – 신라의 유학자, 이두의 완성자
📌 기본 정보
이름: 설총(薛聰)
자: 명확하지 않음
출신: 신라 6두품 귀족
부친: 원효대사(설 원효)
활동 시기: 신라 문무왕 ~ 성덕왕(7세기 후반 ~ 8세기 초반)
🧬 출신과 성장
설총은 불교 사상가 원효의 아들로 태어나, 유교 교육을 중심으로 학문을 쌓음.
신라에서 유교를 본격적으로 정치와 윤리의 기반으로 삼던 시기의 중심 인물로 활동.
6두품 출신이었으나 그 학식과 덕행으로 인해 5품 관등에 오름.
🏆 주요 업적
1. 이두(吏讀)의 체계화
이두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 문장을 표기한 고대 문서체계입니다.
설총은 이두를 정비하고 체계화하여, 관료 문서 및 교육 등에 활용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훗날 향찰, 구결, 그리고 한글 창제로 이어지는 한국 문자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2. 『화왕계(花王戒)』 저술
『화왕계』는 신문왕에게 바친 충언서로, 유교적 덕치(德治)와 절제의 덕목을 강조하는 교훈문.
왕이 미인을 총애함으로써 정사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은유적인 비유(화왕, 두 미녀: 충신과 미인)를 통해 간언함.
훗날 삼국사기 및 동문선에도 실리며, 유학자로서 설총의 입지를 확고히 합니다.
3. 문묘 종사
고려 시대에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배향됨.
설총은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대표적 신라 유학자입니다.
이는 설총의 유교적 공로가 후대에 높이 평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역사적 평가
구분내용
📚 학문
유학에 능하고 이두 정비로 한문과 한국어 사이의 가교 역할
🗣️ 정치
신문왕 시기 간언자 역할 수행, 왕권과 유교 이념 조화 도모
📜 문화
문자문화 발전에 기여, 신라 지식 계층 교육 기반 마련
🏛️ 후대 영향
고려–조선 시대까지도 이두 사용의 창시자로 존경받음
🧾 대표 문구 – 『화왕계』 중에서
“꽃의 임금인 왕이 어찌 미색을 좇아 나라를 그르치려 하는가.” (군주가 사사로운 정에 빠지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경고)
원효는 불교를 통해 ‘일심’을 말했고, 설총은 유교를 통해 ‘덕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부자(父子)가 각기 다른 사상으로 신라 문화의 양 날개를 이뤘다고 할 수 있지요.
[화성=뉴시스] 이준구 기자 =
원효대사 '해골물'로 불리는 오도처는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고분 근처라는 주장이 나왔다.
화성지역학연구소가 주관한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고분과 원효성사오도처에 대한 학술 발표회가 지난 13일 마도면 문화센터에서 열렸다.
고영섭 교수(동국대학교 불교학과)는 "당시 남양만 당항포의 관할지가 당성이었고, 당성이 현재 경기도 화성에 있다"며 "중부횡단항로로 나아가는 출발지점이 남양만 당은포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효의 오도처는 당항성 인근 어느 무덤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효의 오도처와 화성 당항성(당성)부근 백곡리 고분 관계사 고찰’을 발표한 고 교수는 “마도면 백곡리 고분 부근에 입피골과 향기실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고 백사지 터가 발견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곳 백곡리 고분을 원효 오도처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제2발표자인 황보경 교수(세종대)도 ‘화성 백사지와 주변 유적의 성격 검토’에서 “삼국시대 국제 무역항인 당성의 기록과 백곡리유물, 유적, 백곡리 토성의 규모와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백곡리는 당성과 인접한 지역”이라고 했다.
이어 “백사지는 백사(白寺)라는 사찰로 화성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보이고 당항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라며 유적에 대한 적절한 보호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발표회를 주관한 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은 “마도면은 1300여년 전인 서기 661년에 원효성사와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가기 위해 화성에 있는 당성으로 가던 중 마도면 백곡리 입피골(樴山) 향성산(鄕城山)의 백제 대형 무덤군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사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된 오도처”라고 특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