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예술의 장은 감성적인 것, 즉 감각-가상”이라고 말한다. 이때 가상이란 초감성적인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가 아니라 가시적인 이 세계를 말한다. 또 “예술적인 것은 창조하고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이 형이상학적 활동자체를 구성한다면, 최고의 행위인 철학의 사유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행위는 예술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니체는 철학의 사유까지도 예술로부터 규정돼야 한다고 본다. 니체는 “예술을 생의 가장 큰 자극제”로 본다. 예술적인 것은 “창조하고 형성하는 것” 즉 물질성을 띤 가시적인 무엇이다. 그런데 이렇게 “창조하고 형성”한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활동자체를 구성한다.” 그러니까 예술품이라는 것은 사유를 촉발하고 구성한다.
하이데거가 펼치는 니체의 예술론에 따르면 니체는 플라톤적 진리, 이데아, 초감성적인 세계에 대항해서 이 현상의 세계, 가상과 오류의 세계를 긍정한다. 예술작품이란 가상의 세계, 즉 현상 세계의 산물이다. 때문에 니체는 “철학의 사유”도 예술로부터 규정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지는, 플라톤적인 이데아가 아니고 예술이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해서 니체는 말한다. “가상에의, 환상에의, 기만에의, 생성과 변전에의 의지는 진리에의, 존재에의 의지보다도 더 깊고, 더 ‘형이상학적”이다”(같은 책, 93) 이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설명한다. “니체가 진리나 현실, 존재라는 것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플라톤의 의미에서의 참된 것,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이데아, 초감성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감성적인 것과 그것의 풍요로움으로의 의지는 니체에게는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의지다. 따라서 감성적인 것에의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의지가 예술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위 책, 93>
그러니까 니체적 의미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로부터 규정되는 진리이다. 해서 하이데거는 니체에게서 예술은 ‘진리’보다 가치가 있다라는 명제를 이끌어낸다. 나는 여기서 예술작품에도 ‘형이상학적인’ 의지가 있다는 니체의 진술에 주목한다. 즉 예술작품도 사유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술작품은 느낌의 산물이다. 느낌이란 감각이나 감정, 기억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느낌의 중요한 요소인 기억 역시 정신적인 작용의 산물이다. 때문에 니체는 예술에의 의지에 흐르는 ‘형이상학적’ 것을 본 것이 아닐까. 느낌의 출력물이 예술이지만 이 느낌에는 사고작용 또한 개입한다는 것이다. 여튼. 이렇게 산출된 예술품은 타인의 감각과 감성에 다가간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예술적 경험은 질문하고 생각하게 한다. 좋은 영화를 봤을 때를 상상해 보시라! 마음이 벅차오거나, 단말마의 고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르게 살고 싶다고 느낀다. 해서 니체는 철학적 사유도 눈에 보이는 이 세계라는 예술작품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상에 없는 피안의 세계를 사유하고 이 세계를 폄훼하는 플라톤 철학에 대해 니체가 반기를 드는 이유다. 니체에게 예술의 위계가 대단하다!
요컨대 예술작품이란 수련의 산물이다. 예술가는 낯설게 느끼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경험하기 위해 감각의 역량을 벼린다. 이렇게 다르게 느낀 감각의 역량을 대상에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또다시 숱한 연습을 해야 한다. 삶이라는 작품을 위해서도 자기수련(askêsis)이 필요한 이유다. 자기수련을 통해 우리는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수련이란 자기라는 질료를 예술작품으로 변조하는 행위이다. 해서 자기수련이란 예술행위다. 예술은 어떤 허구를 생산한다.
이렇게 생산된 허구가 인간을 충만하게 한다. 나의 새로운 실존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예술품의 지위를 갖는다. 인간의 행위로 만들어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허구나 환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예술도, 삶도 허구를 생산하는 일련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허구들의 존재가 인간을 숨쉬게 한다. 인간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현대 과학과 철학에서 인간, 주체, 객체 같은 것은 실체가 아닌 허구(가상)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감각신경체계가 만들어 놓은 환상일 뿐이다. 존재는 우주의 어느 순간, 어떤 원자들의 배열 상태를 잠시 고정한 사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니체의 계보를 잇는 현대 철학의 입장이다. 불교의 무아도 그렇다. 양자역학 이후 현대 과학에서 인간 존재는 무수한 관계들 중의 관계가 잠시 출현한 사건이다. 인간 존재라는 원자들의 배열은 관계들이 관계들인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종(種)이라는 특성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자아 역시 불교뿐 아니라 현대과학에서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지않는가? 그것은 잠시 현상하는 사건에 불과하다.
어찌보면, 우리 인간은 니체가 말했듯이 생존하기 위해 기만과 오류를 만들며 살아왔다. 허구와 가상들의 세계 말이다. 이 세계에서 철학이나 과학은 개념으로 새로운 가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예술은 감각적 조형물로 세계를 창조한다. 인간의 담론행위를 통한 일체의 활동이란 거대한 환상의 세계이다. 우리는 더 나은 가상, 더 나은 허구를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예술가가 예술품을 산출하기 위해 긴 수련을 하듯, 삶이라는 작품의 예술가가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앎을 몸에 새기는 예술행위를 한다. 이 앎이란 자기에 대한 앎이며 세계와 타자에 대한 앎이고, 이 관계성에 대한 앎이다. 푸코의 파레시아스트(parresiastes)는 그 앎이 삶이 되어 자기와 진실 간에 거리가 사라진 존재이다. 그것은 이렇게 통치당하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 확보한 존재의 자기 실천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통치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삶을 내 방식으로 양식화하고 내가 나를 통치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한다. 삶의 예술가되기는 숱한 자기실천으로 자기를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매순간 자기를 변화시키는, 삶의 기예를 배우는 행위이다. 그때 매번 다르게 연주되고 있는 자연의 리듬에 귀가 열린다. 내가 우주적 음악의 한 소여임을 알게 되고, 세상의 다른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타성에 갇혀 찰라적인 쾌와 불쾌에 탐닉한 채, 하루를 매번 동일하게 살아낼 때, 권태와 무기력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나타난다. 우리 앞에 있는 감각의 데이터들을 다르게 만나게 되면 다른 느낌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런 감각과 감정의 역량을 키우기 해서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공부한 내용을 삶에 적용해야 한다. 푸코가 자기배려를 실존의 미학, 실존의 기예라고 말한 것은 이 실존을 미학적으로 변화시키는 테크닉이 자기 배려이기 때문이다.
해서 감관을 훈련해야 한다. 단순한 쾌불쾌의 분별을 넘어 쾌불쾌의 분별이 사라지는 감관을 수련해야 한다. 매순간 삶은 새로운 차이를 향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예술행위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다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윤리적인 삶을 향한 자기배려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다. 예술 활동 역시 마찬가지다. 끝없는 과정만이 있다. 요컨대 삶이란 차이를 향한 과정의 이행에 다름아니다. 다른 역량의 존재를 향한 끝없는 변신을 실천하는 행위가 삶을 작품으로 만든다.
최근 읽고 있는 <티벳 사자의 서>(정신세계사, 파드마삼바바, 류시화옮김)는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후 49일간 바르도(Bardo)라는 사후세계에 머문다. 이때 윤회의 사슬을 끊고 대자유의 길로 해탈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다시 세상으로 내려온다. 다시 환생하는 것이다. 흔히 업(業)이 윤회한다고 말하는데, 이때 업이란 탐진치(貪瞋痴)로 구성된 의식체라고 볼 수 있다. 죽어서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이 의식체(혼)는 49일간 바르도 상태에 머물다가, 다시 인간의 자궁으로 들어간다. 축생으로 윤회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윤회의 삶을 거듭한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 종종 자신의 전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생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당신도 자신의 전생이 궁금하신가? 그런데 책의 맥락을 잘 따라가다 보면 전생을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나의 삶을 들여다보면 된다. 지금 나의 모습이 바로 그대로 전생이었다! 또한 미래에 도래할 환생의 삶 역시 지금의 나를 들여다 보면 된다. 즉 미래의 나 역시 지금과 유사한 모습으로 수만 겁의 삶을 윤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