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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미학, 내 삶의 예술가 되기

by 오, 자네 왔는가 202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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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미학, 삶의 예술가 되기

 

  예술의 사전적 정의는 “미적 작품을 창조하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산물과 그 산물의 감상, 향유”까지를 포함한다. 문제는 이 ‘미적인 작품’에서 미(美), 즉 아름다움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니체 1>(도서출판 길, 박찬국 옮김)에서 “미학은 아름다움과 관계할 때 인간의 감정 상태를 고찰하는 것이며, 인간의 감정 상태와 관계되는 한에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이라고 말하다. 이어 “아름다움 자체는 자신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감정] 상태를 산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즉 아름다움이란 예술이 “자신을 드러내면서” 어떤 고양된 감정 상태를 산출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 문장에서 하이데거는 “아름다움은 자연미일수도 있고 예술미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여튼 아름다움 자체란 “자신을 드러내면서 어떤 감정상태를 산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할까?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상정할 때 ‘보편’이라는 폭력에 갇히기 쉽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과 형식에 맞추기 위해 고투하게 된다. 예술 혹은 미술의 역사를 보면 늘 당대의 ‘보편’적인 미 개념을 넘어서려는 부단한 시도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카소, 고흐, 고갱, 모네, 마네, 프랜시스 베이컨, 마그리트, 벨레스케스... 등등의 화가들의 시도를 생각해 보시라. 이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의 역사 또한 기존의 철학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고 봐도 무방하지않을까? 잘 알려진 니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등 이들은 기존 ‘보편’ 개념의 거부를 모토로 했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허구를 넘어서려는 무수한 창조적 행위를 나는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예술의 사전적 정의 중 “미적 작품을 창조하는 인간의 활동”, 즉 예술 창작행위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이 예술창작 행위는 문학, 음악, 미술, 무용이라는 좁은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삶이라는 재료로 우리는 예술 행위를 하고 있다. 나에게 예술이란 자유로워지기이다. 무언가에 갇힌 것은 자유로울 수 없다. ‘보편’에 얽매인 아름다움의 개념이란 어떤 보편 안으로 예술을 우겨넣는 것이다. 해서 이 보편을 새롭게 갱신하려는 시도들이 거듭 실험된다. 아름다움이란 어떤 틀로 규정되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이 자유로움이 아름다움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을 생각해보시라! 일정한 격자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분방함, 기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려는 저항과 시도들이 아름답다. 그것을 “미적 행위”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종국에 가서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개념을 넘어서는 자유, 그것을 예술이라고 정의하자.

 

  그러니까 예술가들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프리즘으로 창조하려고 실험하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은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아서 어느 날 뚝 떨어지지 않는다. 고된 시도로 넘어지는 연습을 거치는 무수한 과정만이 있다. 그것이 예술행위의 본령이 아닐까? 삶의 예술가 되기 또한 다르지 않다. 뒤샹이 변기를 샘이라 이름붙이고 전시하기까지, 어떤 형태로든 숱한 시도와 훈련을 거쳤을 것이다. 느낌을 벼리고 관점과 시선을 변환하는 많은 실전을 치렀을 것이다. 작가가 무수한 파지를 내고난 후 작품을 완성하듯.

 

  예술작품이란, 땀의 흔적이며 고통의 기록이다. 규정에 갇히지 않으려는 해방의 몸짓이다. 예술가란 끝도없이 감각의 다른 문을 열기위해 도전하고 연습하는 자들이다. 지금과 다른 감각의 펼쳐짐을 사유하고 그것을 몸에, 목소리에, 화폭에, 문장에 기입하는 자들. 해서 예술가가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가는 작업이기도 한데, 자기를 만나려는 무수한 시도와 훈련이란 지금의 자기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이 시도를 통해 감각적인 ‘무엇’을 산출해내는 작업, 이것이 예술창작행위다. 일상에 메인 뻔한 감성에 다른 느낌의 창을 내려는 자들. 때문에 몰입이나 자기내면으로 들어가기란 자기 밖으로 나와 낡은 ‘보편’을 깨기 위한 작업이다. 일상성과 동일성에 머물지 않는 자기를 조직하기 위해 예술가는 몰입한다. 몰입은 일순간 자기의 기존 감각방식이나 신경회로 밖으로 나가는 고행이다.

 

  그 숱한 고행은 지금 이 오감의 세계에 매몰된 자기를 구원하는, 즉 다르게 세상과 만나는 하나의 방식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기존의 감각회로나 신경체계를 고장내고 변형시킬 정도로 수련해서, 다른 문을 열고 다른 리듬을 만들고, 그것을 대상에 구현하는 것이다. 해서 뼛속까지 내려가 자기를 만나려는 몰입의 창조행위는 다른 세계의 조형을 위한 수행에 다름 아니다. 뻔한 감각작용에 번개를 내리치고, 다른 에너지장들을 만나려는 발명의 연습 행위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낯선 힘을 받아들이고 공명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쉽지않다. 지금 이 순간의 안정성을 찌그러트리고 생명 에너지의 장을 바꾸는 능동적인 훈련이니. 이때 몸의 감각이 달라지고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이란 ‘보편’과 다르게 느끼고 겪어낸 것들을 각각의 장르에 기입하는 것이다.

 

  삶의 예술가가 되기란 살아지는 대로 살지 않으려는 의지다. 자기라는 작품을 부단히 새롭게 조형하기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인들이 수행했듯이 자기의 실존을 돌보는 것이다. 살아지는대로, 살아가는 것은 삶이라는 작품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살지 않으려는 무수한 수련이 생을 예술품으로 상승시킨다. 내 삶을 돌본다는 것은 조건화된 감각의 논리에 따라, 사회시스템의 패인 홈을 따라 삶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 실천이다. 감각의 논리는 탐진치에 복종하고 습관에 구속되어 안일함과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해서 흐른다. 술을 마시면 내 감각은 알딸딸한 기분에 쾌락을 느낀다. 맛난 음식을 먹으면 내 혀의 미각은 행복하다고 느낀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해도 잘 안 된다. 좋은 것이 좋고, 습관대로 사는 것이 안정감을 준다. 대체로 감각시스템은 생각하거나 변화시키려는 훈련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는 살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몸과 마음은 이를 집요하게 거부한다. 인간은 뇌에 기입된 기억 정보에 따라 습속에 따라 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즉 당장의 감각적 쾌락의 논리에 따라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삶은, 다름아닌 이 감각에게 큰 불쾌를 가져온다. 이 순간의 감각의 쾌락이 다음 순간의 감각의 불쾌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감각의 논리로만 살 경우 바로 그 때문에 폭넓고 광범위한 감각적 고통을 초래하는 역설을 시사한다. 우리 몸이란 감각과 정신이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푸코는 엄숙주의를 권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쾌락은 능동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돌봄이다.

 

  자기 돌보기는 당장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편협함에 복종하지 않는다. 매일 대항감정 습관을, 대항행위 습관을 만들어가자. 이것은 내 신체라는 질료에 무수한 가능성을 입히는 것이다. 자연, 혹은 우주의 흐름과 리듬에 참여하는 숱한 창문들이 내게 있다! 섬세한 수련으로 다른 창들이 열릴 때 다른 것들이 눈 앞에 보인다. 획일화되고 길들여진 기존 감각의 회로를 변경하거나 활짝 열어제치는 것이 문제다.

 

 

해서, 다른 질감과 깊이의 세계를 만나려면, 앎과 사유와 수련이 선행돼야 한다. 앎을 위한 배움과 성찰이 필요하다. 몸을 써서 공부해야 한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실제로 피아노를 쳐야 한다. 음악과 연주에 대한 지식을 공부해야 한다. 회화도 마찬가지이며 문장을 짓는 작가도 그렇다. ‘나’라는 유기체와 타자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 앎을 몸에 새겨야 한다. 이 순간 우리는 새로운 쾌락을 경험한다. 만족스러운 작품을 완성한 순간의 짜릿한 쾌락을! 실존이라는 작품은 계속 완성되고 다시 완성되는 이행의 과정이다. 이 때 맛보는 쾌락들이란 내가 주체적으로 일구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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