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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통치성이란 무엇인가?

by 오, 자네 왔는가 2025.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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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걷고 있다. 빽빽한 초록색 나무들이 재잘거린다. 새들도 지저귄다. 태양이 갸웃갸웃 고개를 디밀고 있다. 태양은 궁금했나 보다. 초록색 광선들이 쏟아진다. 숲은 두둥실 떠오른다. 태양의 양기가 나에게 스며들어온다. 자연의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활발발하다. 시끄럽다. 뜨겁다. 산은 위험하다. 숲은 위험하다. 숲의 에너지에 나는 감전된다.

 

  무상의 증여, 그 강렬한 기운의 장(場)이 나를 휘감는다. 내 몸에 초록물이 든다. 나는 지금 산속 호수에서 나룻배를 타고 유영하고 있다. 흐르고 흐른다. 조각배는 나를 싣고 흘러간다. 숲의 연주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멀리 흰 구름이 보인다. 일상의 질서는 해체된다. 시간은 탈구된다. 부호들과 글자들과 구획과 경계는 무너진다. 존재의 근원인 무한한 에너지만이 교교히 흐른다. 카오스다.

  이상한 힘에 이끌린다. 내 몸이 전달하던 낡은 메시지들이 사라진다. 나는 몸을 비튼다. 젖은 걸레를 짜면 나오는 구정물처럼 내 몸의 여러 상징들이 지워진다. 여자, 동양인, 한국인, 누구 엄마, 어느 지역 출신, 나이... 이것들을 정체성이라 해야 할까? 나는 자유를 느낀다. 무한의 카오스에 나의 작은 카오스도 덧대어 본다. 삶은 이렇게도 깊게 인간을 분절하고 분해하고 있었구나.

 

  카오스를 해체해서 인공의 단위로 재조립했구나. 근대 ‘권력-지식’은 인간을 분류하고 해부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시켰다고 푸코는 말했던가. 내 몸이, 의식이 모두 거대한 조립품이었나. 누더기 조립품으로 기우뚱기우뚱 살아왔구나. 나는 몸으로 동작으로, 태도와 표정으로 세상과 권력의 규율과 규범을 구현하며 살고 있구나.

 

이제 상상의 나룻배에서 내려온다. 조망권이 바뀌면 세계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근거리에서 보면 나무는 욕망으로 부풀어 오른다. 나무는 욕망한다. 태양의 빛에너지를 받아 물과 이산화탄소로부터 탄수화물과 산소를 생산한다. 나무의 광합성작용은 나무의 생명을 높게 높게 끌어올린다. 나무의 욕망은 자신과 타자를 살린다. 욕망하려면 적어도 나무처럼 욕망하자. 고유의 힘을 실험하는 욕망, 승자독식과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코드의 재생산에 복무하지 않는 욕망. 자기의 꽃과 열매를 남에게 주려는 욕망. 남에게 모두 퍼주면서도 수백, 수천년의 천수를 누리는 나무들.

 

세계는 지금 아프다. 너무 욕망해서 그렇다. 동일자만 욕망하면 모두 아프게 된다. 그런데 이 아픔은 환상(幻像)은 아닐까? 정신이라는 감옥과 신체라는 감옥은 권력작용이 만든 실재하는 가상이 아닐까?

 

  푸코의 책 <주체의 해석학>(심세광옮김, 동문선)을 접하자마자 느낌이 왔다. 이 책이 나를 구원할 것이다! 그 즈음 자아, 의식, 내면 등등으로 표현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필요가 앎의 의지를 자극한 탓일까? 잘 읽혔다. 푸코의 다른 저서에 비해 비교적 쉽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20년 말부터 연재를 시작해 이듬해 하반기까지 썼다. 그때 프롤로그를 쓰면서 소망했다. 연재를 마칠 즈음에는 나도, 글을 읽는 독자들도 불현듯 성장했으면!이라고. 간절했다. 그래, 글을 마친 지금 나는 성장했나? 그렇다! 라고 말한다. 당시 “이 글은 나를 위해 쓴다”라고 프롤로그에서 고백했듯이 나는 변하기를 원했다(이 책 제2부 프롤로그 참조).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변화를 나는 성장이라고 표현했다.

 

  성장이라는 단어로 지칭한 것은 달라지는 것, 나아지는 것 정도였다. 나는 나아졌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 글이 내 스승이다. 물론 내 글에 불만이 많다. 내 글은 울퉁불퉁하고, 유아적이고 세련되지 못하다. 내가 내 글에서 배운다는 말은 훌륭해서가 아니다. 내 글은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글을 쓸 때의 호흡과 단어의 느낌, 감정과 정서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장을 쓰던 순간의 기분상태, 쓰고 싶던 열망 등등. 나는 글의 탄생 순간의 나와 밀착돼 있었기에 그 글의 살내음을 잘 알고 있다.

 

 다른 한편, 내가 쓴 글은 내가 쓴 글이 아니다. 글 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접신한 듯 다른 존재였다. 나는 그 순간 우연히 탄생하는 신체와 정신의 산물을 열심히 쏟아낸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 나에게서 쏟아져 나온 문장들에는 내가 잘 모르는 무엇이 있다. 무의식이라해도 좋다. 이때, 나는 과거의 기억정보와 조우하고 현재의 햇살과 공기와 습기와 분위기에 연결된다. 방 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의 파동과도 알게 모르게 만난다. 도래하지 않는 미래의 무엇과도 연결된다.

 

  그러니까 그 순간 내가 만들어내는 문장은 나의 능력이나 일상을 넘어서는 경험들이기 쉽다. 그것은 다종의 이형접속의 결과물들이다. 이 리듬들은 그 순간에만 고유한 것이어서 지나고 나면 동일한 문장을 쓸 수가 없다. 다음 순간 혹은 다른 날 쓴 글은 다른 얼굴과 두께와 부피로 다른 질감으로 나타난다.

 

  다시말해, 글은 내가 썼지만 내 것이 아닌 셈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여러 사건과 사물의 병치, 수수께기같은 유희들의 모음집이며 나를 넘어서는 어떤 능력들의 집합적인 신체다. 그렇게 탄생한 글은 나에게 먼저 깨달음을 준다. 그러니까 나의 글은 나의 놀이의 산물이다. 그것은 어떤 실험이다. 내 삶이 외부의 규범성에 붙박히지 못하게 막는. 나는 이 유희의 공간에서 성장한다. 나는 전복적인 불온한 존재가 되고 싶다. 내겐 그것이 ‘성장’이다. 매순간 체제와 고정된 합리성의 틀들을 전복하는 놀이 즐기기, 놀이는 가볍다. 삶이 놀이가 되기를, 계속 새로운 놀이를 발명하기를.

 

  지금 이 글은 어디로 튀고 있는 중인가? 아차! 내 글에서 내가 배운다는 말을 하고 있었지! <주체학의 해석학>을 읽고 글을 썼고 내가 쓴 글들에 힘입어 내가 성장했다고 말했다. 좀더 명랑해졌고 덜 불안해졌으며 나를 사랑하게 된 만큼 타자들에게 사무치게 공감하게 됐다. <주체의 해석학>을 만난 덕분이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행위는 연결이고 만남이다. 마주침이 삶이다.

내가 자주 무거워진 것은 마주침의 미숙함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익숙한 대상과 익숙한 방식의 만남에만 익숙했던 것이 아닐까? 글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쓰기는 마주침이야. 네가 쓰는 글은 이질적인 대상들과 잘 만나잖아! 그게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쓰면서 나는 누구와도, 어떤 대상에도 열려 있다. 글은 잘 모르는 것들을 만날 때, 다른 존재의 경이로움을 배운다. 삶 역시 그렇다. 잘 모르는 존재들과 예기치않게 닥친 불운이나 위험 등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이 능력을 성장으로 정의하기로 한다. 이 능력이 커지려면 가벼워져야 한다. 배운 것을 버리고 가진 것을 줄이고 편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측 밖의 사건들, 입체감 넘치는 생성소멸의 강렬한 힘들과 희노애락과 간난신고를 겪어낼 능력이 필요하다.

 

 

  <주체의 해석학>에 꽂힌 건 나의 어떤 무능력함에 대처할 힌트를 얻어서인 것 같다. 감정의 습관과 행위의 양태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주체의 해석학>은 이에 대한 통찰을 준다. 그러나 편안한 당의정은 분명 아니다. 난해하고 재미없는 덤불숲을 헤메고 다니다가 불현듯 아! 하고 멈추게 된다. 이 순간 책은 생각과 행위, 사물에 대한 표상과 정념을 바꾸라고 명령한다.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을 바꾸라고.

그러니까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다른 관계의 가능성에 서툴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나와 다르게 마주할 방법을 모른다. 타인들과도, 저 별들이나 태양과도.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 한가한 소리하고 싶지도 않고 일단 바쁘다! 이런 생각이 신체를 병들게 하고 병원을 찾게 한다. 당장 저 나무와 만나는 방식부터 바꿔보자! 그러면 몸이 아프지 않고 마음이 평온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관계맺기의 능력이란 나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로 수렴된다. 자기배려로 귀결된다. 자기인식이란 이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주체의 해석학>의 핵심 단어인 ‘자기배려(자기돌봄)’를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감정이나 인식이나 진실이나 관계나 성공이나 돈이나 이런 것을 대하는 태도 바꾸기. 즉각 행동 바꾸기. 다시 말하지만 자기와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문제다. <주체의 해석학>은 그 방법을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로마의 철학자들의 실천 기법들을 통해 알려준다. 나는 이들의 금언과 실천테크닉들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나는 알게 됐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덩달아 변하는구나! 세계는 이렇게 얽혀있구나! 나는 나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예외로 하고 세상만 변하기를 바라지 말자!

 

■통치, 통치성이란 무엇인가

푸코는 통치, 통치성을 품행의 인도라는 의미로 사용

 

<주체의 해석학>을 만나기 위해 통치성(gouvernementalité) 개념을 간략히 이해하도록 하자. 곧 시작될 이 책의 제1부는 통치성 개념을 중심으로 푸코 철학의 맥락을 짚어 간다. 거듭 말하지만 제1부를 공들여 읽고 나면, 제2부부터는 쉽고 재미있게 푸코의 후기 사유를 만날 수 있다.

 

  통치성은 <주체의 해석학>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푸코의 후기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 책 제1부,통치성과 주체의자기배려참조>. 통치(le gouvernement)란 말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목권력의 통치기술에서 유래한다. 사목의 영혼의 통치술을 교부들은 “기술 중의 기술, 지식 중의 지식”이라고 극찬했다. 사목권력의 통치란 “요람에서 무덤까지, 무덤 이후 구원까지 양들을 책임지고 보호하며 그들의 행동과 태도, 영혼의 상태까지 통제하고 관리하고 인도하는 방식”이다. 이 사목권력의 통치기술은 종교개혁 등으로 사목권력에 위기가 닥쳐오면서 차츰 세속국가의 통치로 이동한다.

 

  사목권력이 위기를 겪게되면서 16세기가 되면 여러 층위의 ‘통치들’이 나타난다. 군주의 통치, 아동의 통치, 판사의 통치, 지사의 통치, 가정의 통치 등등. 통치의 대상이 “가정, 어린이, 인구, 영토” 등등으로 외연이 넓어지는 것이다. 군주의 통치는 이런 통치들 중의 하나였다. 통치의 정의를 보자. 통치란 “사람들을 적절한 목적으로 이끌기 위해 사물을 올바로 배치하는일”이다 <안전 영토, 인구>(난장, 오트르망 (심세광, 전혜리, 조성은)옮김, 146쪽) 좁게 말하면 인간의 품행을 인도하는 “숙고된 행위나 절차 혹은 방식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즉 통치란 목자든, 부모든, 친구든, 가장이든, 이웃사람이든, 자기자신이든, 행위에 개입해서 그의 품행을 인도하는 것이다. 즉 통치자가 원하는 대로 상대의 품행을 바꾸는 개입행위이다. 앞서 언급했듯 여러 층위의 통치들이 있었으나 16세기 이후가 되면 국가가 개인- 인구를 인도하는 방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일명 국가 통치이다.

 

통치라는 말의 어원을 보자.

 

  “16세기 이후 완전히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기 전까지 ‘통치하다’는 말이 공간에서의 이동, 운동, 물질적 생필품의 조달, 개인에게 부과되는 치료나 약속된 구제, 늘 헌신적이면서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지휘나 명령의 실행 등 매우 넓은 의미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통치하다’는 자신이나 타인, 타인의 신체, 더 나아가 그 영혼이나 행동방식에 행사될 수 있는 지배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통치하다’는 교류, 개인들끼리의 순환과정이나 교환과정도 지칭합니다. 아무튼 이 모든 의미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국가가 통치된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위 책, 178p>

 

  이때까지는 국가 통치라는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16세기 이후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때부터 사목권력의 통치기술은 군주의 세속국가 통치로 이동한다. 국가의 통치는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형을 거쳐 현대의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이르게 된다. 푸코가 통치성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성’이란 것이 개인-인구의 주체화 방식을 ‘주어진 상수로서’ 부과하는 때문이다. 즉 국가 통치술이란 인민의 방정한 품행을 설정하고 인도하는, 예속화의 기술이다. 말하자면 개인과 인구의 삶에 개입해서 콩놔라! 밤놔라! 일상생활을 통째로 제 구미에 맞도록 관리, 조절하는 전략 전술의 총체다. 그러나 무식하게 대놓고 하지 않는다. 장(場)에 개입해서 장을 바꾸는, 말하자면 무의식적 개입술을 쓴다.

 

  예를들면 현대의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은 경쟁하는 인간, 성과제일주의, 경제동물 등등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양식화한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자는 루저가 된다. 우리가 기를 쓰고 성공하려고 자기를 닦달하는 삶의 방식은 나도 모르게 거대하고 획일적인 통치성에 예속된 증거일지 모른다.

 

  즉, 국가의 통치란 예속화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총체라는 것이다. 생명관리권력과 유사한 개념인 ‘통치성’은 여타의 지식과 안전장치라는 도구로 움쭉달싹할 수 없게 우리의 품행을 인도하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개인은 국가의 통치이성의 구미에 맞게 자기주체성을 구축하게 된다. 이것에 우리는 저항할 수 있으며 대항품행을 고안할수 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국가의 통치성에 맞서 자기를 통치하기, 이 자기의 통치가 다름 아닌 자기배려다.

 

  자기통치로 자유를 실천하기, 지금과 다른 주체로 자기를 구성하기. 즉 새롭고 능동적인 자기 형성이란 새로운 관계성의 생산에 다름 아니다. 국가가 인도하는 일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자기를 인도하는 불복종, 이를 푸코는 자유의 실천이라 말한다. 일명 대항품행이다.

그러니까 나를 ‘방정한’ 품행으로 인도하는 국가권력의 통치성은 이에 항거하는 대항품행의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품행의 인도’와 ‘대항 품행’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개인은 국가의 통치에 대항해 스스로를 주체화할 수 있다. 자기통치의 주체 되기가 후기 푸코 사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야 타자통치 또한 제대로 할 수 있지않겠는가? 공자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와 유사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에는 타자를 통치하는 자는 우선 자기를 잘 통치해야 했다. 자기 수행이 제대로 된 자(者)만이 정치에 입문해서 타자를 잘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기의 푸코는 이 통치성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자기통치와 타자통치 등 자기돌봄의 윤리를 구축하게 된다. 윤리와 정치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돌봄의 윤리는 지금과 다른 나의 품행을 양식화하고 다른 삶을 꿈꾸는 자들의 윤리이다. 나를 당신같은 자들에 의해 통치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거야! 나는 당신같은 자들이 요구하는 방식의 성과주의, 자기계발, 1인기업의 경영자로서 자신과 타자를 착취하는 삶을 살진 않을 거야! 나는 다른 통치자를 선택할 거야!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훌륭한’ 품행의 소유자가 되진 않을거야. 삶의 스타일을 내가 창조할 거야!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꾸기. 나의 주권을 내 몸에 새기기.

나는 산길을 내려오고 있다. 잠시라도 다른 권력관계에 머무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자기배려하기란 일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다른 힘의 관계로 매일 인도하는 것이다. 매번 유동하는 나와 나, 나와 타자와 세계의 힘관계의 장에서 어떤 순간 힘을 빼야하는지, 어떤 통치성으로 나를 다스려야 하는지, 어떤 예속의 힘에 굴복하지 말아야 할지, 우리는 직면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른 통치를 발명해 보자. 그리고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지금과 다른 삶을 고안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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