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마라
-문병란 <희망가> 중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나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당시 나는 잡지사 편집장 일을 했는데 노동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업무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고지식한 나는 허드렛일부터 중요한 일까지 대부분을 내 손으로 해결했다.
자신을 쉬게 하는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관대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스타일이라 잔꾀를 부리거나 품이 많이 드는 잔일거리를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았다. 또 좀 더 새로운 콘텐츠와 참신한 편집을 찾는 등 자꾸 일을 만들어서 했다. 모든 걸 철두철미하게 하는 성격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나온 발행물을 대하면 마음은 뿌듯했지만 일에 찌들어 사는 날들이었다. 건강이 좋을 리 없었다. 훌훌 직장을 털고 나왔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후 줄곧 일을 해온 내가 집에서 마냥 쉬는 건 더 힘들었다. 소일 삼아 할 일을 찾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천경 산문집 ‘키스해도 돼요?’(북코리아 刊 )를 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을 한 달만에 써버리는 바람에 시나리오와 드라마 등을 습작하면서 소일했다.
당장 임신을 원하는데 직장 일을 병행하면서는 순조로운 임신과 출산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면 휴지기(休止期)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집에서 할 취미 생활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십자수를 놓는 것이든 꽃꽂이든, 독서든, 아무튼 할 일없이 시간을 죽여야 하는 상황은 좋지 않다.
직장을 그만 두고 처음엔 잠만 실컷 잤다. 그동안 잠 한 번 원 없이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오전에 남편 회사 나가는 거 잠시 보고 다시 잠을 자기 시작한다. 계속 잔다. 일어나기가 싫다. 더 이상 누워있는 것이 힘들 만큼 등뼈가 아파오면 슬슬 일어난다. 물 한잔 마시고 빈둥빈둥 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신다. 한적한 오후의 흐느적 대는 창 밖 풍경을 보며 홀로 앉아 커피 한잔 마시는 즐거움! 나에겐 점심식사 후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의 향그러움이 인생의 낙일 만큼 좋다. TV를 켜고 창 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와! 좋다!’ 탄성이 나온다.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 다닌다. 미용실과 쌀집, 수퍼마켓, 부동산 중개소.....
이렇게 한가한 혼자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언제였던가! 꾸물꾸물 게으름을 피우다가 신문을 보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딱히 보낼 사람도 없건만 이메일을 점검하고 포털 사이트를 훒어 본다. 그리곤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은 속력이 붙어서 마구 써진다. 어떤 날을 영화를 보기도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남루한 인생에게 눈을 맞추고 , 내 속에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슬픔과 조우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창 밖으로 비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어느 덧 유리창 밖으로 희끄무레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왔고 저녁도 먹었으니 이젠 잠을 자야 한다. 하지만 잠을 자고 싶지 않다. 낮에 잠을 많이 잔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자고 싶은 데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가고 싶은데. 행복한 꿈을 꾸고 싶은데...환장할 노릇이다!
새벽 2시, 3시, 4시, 5시...... 점점 잠을 자는 시간이 늦어져서는 급기야는 새벽 6시에 잠이 드는 것이다.
밤과 낮을 거꾸러 사니 건강은 더 나빠졌다. 그런데 일단 잠이 들면 일어나기가 싫어서 계속 자게 되고 그렇게 잔뜩 잠을 자고 났으니 밤에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밤에 눈을 말똥 말똥 뜨고 누워 있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갔다.
누워있다 보면 새벽이 온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이렇게 해서 아이를 낳겠다고! 말도 안 돼. 금쪽같은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다니!
더구나 직장생활 할 때 보다 몸은 더 안 좋은 신호를 보내왔다. 운동을 하자!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직장 다닐 때는 아주 늦은 퇴근만 아니라면 하루 1시간은 간단한 운동을 했지만 쉬고 있으면서는 운동을 깜빡깜빡한다. 이건 아니잖아!
잊고 있던 운동을 시작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오전 7시 일어나 남편 출근하는 거 보고, 잠을 자는 대신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글은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그렇게 쓰다보면 금세 오전 11시가 훌쩍 넘는다. 그때부터 약 1시간 남짓 낮잠을 잔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오전에 물만 먹고 다시 잠 자리에 드니 제아무리 잠이 많다 해도 오후 1시 정도 되면 배가 고파서 일어난다. 늦은 점심을 먹고 늑장을 피우며 저녁을 맞는다. 이렇게 하니 그나마 좀 생활 패턴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밤 12-새벽 1시 사이에는 잠을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낮잠 한 시간 가량 자는 거를 빼면 그럭저럭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두달이 흘렀다.
하지만 컨디션은 전 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산에 오르다
스트레스와 과중한 노동강도를 ‘주범’으로 보고, 일을 접고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 상태는 더 나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신호로 치아와 잇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잇몸질환이라는 게 잇몸자체의, 즉 구강내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내 경우는 몸이 안 좋다 싶으면 가장 먼저 치아가 말썽이다. 잇몸이 붓고 피가 나고 치아가 흔들리는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내게 가장 취약한 치아는 내 건강상태를 가늠하는 바로미터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상하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아, 그렇구나! 무릎이 탁 쳐졌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은 활동량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출퇴근을 했으니 계단을 오르내리고 지하철에서 나와 회사까지 걷어야 했다. 또 사람들을 만나러 나다니는 직업이라 자연히 하루에 걷는 양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뒹굴고 있으니 그 많은 활동량을 어디서 보충하겠는가?
스트레스가 없고 몸만 편하다고 바로 임신이 되고 유산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직장생활 할 때의 활동 양을 유지 해야 한다!
집 근처에 약수터가 있다. 사람들이 자주 오르내리는 동네 산으로 집에서 왕복 2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작은 물통을 들고 오후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산에 오르자 욕심이 났다. 이제 산에서는 신발을 벗고 걷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잇몸과 치아가 좋아졌다. 그렇게 한 달인가 지나자 몸무게가 약간 늘기 시작했다.
두 달 석 달...여섯 달....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되고 봄이 왔다.
와! 얼굴에 살이 붙고 피부가 매끄러워지고 밥맛은 어찌 그리 좋은지...
밥이든 뭐든 잘 먹고 물을 특히 많이 마셨다. 그리고 하루 2시간 집에서 운동하고 2시간은 산에 다니고 그 외 시간은 집에서 느긋하게 지냈다.
얼굴에 다시 윤기가 흘렀다. 실제 나이 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는 걸 컴플랙스로 느끼고 있었기에 얼굴과 몸의 피부가 단단해진 느낌은 신나는 경험이었다. 물론 산에 몇 개월 다녔다고 푸른 청춘으로 변할 수야 있겠는가? 다만 움푹하던 볼이 좀 통통해지고, 몸무게가 약간 늘게 되니 비쩍 말라 물기가 없어보이던 얼굴에 푸른 수액이 도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몇 달 만에 만나는 친구나 후배는 “선배 얼굴 좋아졌네 역시 집에서 노니까 좋아지는 구나?”그런다.
‘말도 말아라. 얼굴이 좋아지기까지 내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니가 알겠냐?
다른 사람들은 물만 먹어도 살이 찌고 집에 있으면 몸무게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나는 뭐를 먹든 살이 찌기는 커녕 하루하루 줄줄 살이 새지나 않길 바랄뿐이었다. 집에서 놀고 먹으니 오히려 체중이 감소했다. 그런데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균형 잡히게 약간이지만 살이 찐 것이다. 컨디션도 좋았다. 평소 손발이 찼던 난 내친 김에 하루 20분 가량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족욕을 시작했다. 그러다 더 욕심이 나서 손에 뜸을 뜨기 시작했다.
몸이 날아갈듯 가뿐하고 모든 게 좋았다.
그렇게 2004년 4월이 지나고 있었다.
건강하고 얼굴에 윤이 나고 시간이 가도 지난해보다 오히려 젊어진 느낌은 참 좋았다. 그 사이 산문집도 완성했으니(출판사를 찾지 못해 원고가 노트북에 잠자고 있었지만), 다시 직장에 다니며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했다. 그러고 보니 약 10개월 정도 쉰 셈이다. 신진대사가 왕성해지고 몸 상태가 최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임신은 되지 않았다. 안 되는 임신을 어쩌겠는가? 몸이 가볍고 젊어진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나로선 최선을 다했고 지금 건강상태는 최고다. 그런데 임신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하늘의 뜻 아니겠는가? 당시 나는 마흔 둘이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걸 가지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 아닐까?
난 지금 건강하고 행복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행복한 노년이나 설계하며 아이 없이 사는 미래를 그려보자! 이 나이에 아이를 갖겠다는 건 과욕일거야. 것도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마음이 강한 것이라면.
나는 새 노트를 한권 사서 남편과 나의 ‘20년 후 노년의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직장 일을 다시 시작하면 저축을 한 달에 얼마씩 할 것인지 등등... 그 즈음 일산쪽에 분양받은 아파트에 2005년 입주 예정이라 노년에 전원생활하며 글을 쓰기에도 적합했다.
투자가치 같은 건 따지지 않았다. 그냥 우리가 살아갈 집이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주변에 논과 밭이 있고 공기가 맑은 소위 나홀로 아파트를 택했다.
다시 일자리를 알아봤다. 곧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는 회사에 자리를 얻었다. 1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출근 하기로 했다. 근 1년을 쉬고 나니 간절히 일이 하고 싶었다. 이제 ‘한 낮의 한가한 휴식’도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사람이 그리웠다. 수다 떨고 열 받고 뒷담화 하며 낄낄거리던 사람들, 원고 마감을 마친 날, 오전 11시가 넘으면 ‘오늘 점심 뭘 먹을까?’ 고민하던 기억이 세삼 그리워졌다. 더구나 나이 마흔이 넘어 집에 오래 있게 되면 재취업은 불가능하다는 절박감도 생겼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인간관계가 어눌하기만 해서 살아오는 내내 손해보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일 속에서 가슴이 설레었다. 일 속에서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책을 쓰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당시로선 무엇보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 그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다시 사람에게 상처받고 힘들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더욱이 나는 대학졸업 후 거의 쉬지 않고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근 1년을 집에서 빈둥거렸더니 우선 일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당장 일하러 오라는 곳도 생겼다. 감사했다. 1주일 후면 출근하는 것이다.
그동안 엉망이 된 집안을 정리 하고 운동에 빠져 살던 마음도 추스르고 어찌됐거나 일을 하자! 건강이 좋아졌으니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면 좋지만 안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제 이틀 후면 출근한다. 첫 출근하는 날 입을 옷도 선택해 두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생리를 해야 하는데 왜 이번 달은 생리가 없는 거지? 세상에! 임신인가? 오 마이 갓!
임신이 안 되는 걸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제 ‘황홀한 노년기’를 맞을 채비도 하고 노년의 계획도 세워두고 더구나 전원 생활이 가능한 곳에 집도 장만해두지 않았는가?
그런데 임신이라면? 모든 계획이 헝클어지는 것이다! 정말 임신일까? 그럼 출근은? 노년 계획은? 전원주택은?
자가 임신진단 시약을 사와서 테스트를 했다.
이럴수가? 임신이었다.
분홍색 두 줄이 선명한...